어제 역시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다녀왔습니다. 대구전을 관전하기 위해서였지요.
K리그 8라운드까지 기준을 잡았을 때, 수원과 대구는 둘 다 리그 팀득점 공동 1위였습니다. 수원은 리그 최소실점팀, 대구는 리그 최다실점팀이라는게 좀 달랐지요. 그만큼 수원은 공수 모두 균형잡힌, 대구는 수비는 신경쓰지 않고 "돌격 앞으로"를 지향하는 팀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이러한 대구의 수비에 대한 의견을 쓴 적도 있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대구의 행보를 매우 좋아하고 지지하는 듯합니다.
이 경기는 <공격축구 vs 공격축구>의 대결로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탄탄한 수비를 기초로 해서 강력한 골결정력, 즉 "한 방"을 갖춘 수원, 그리고 흡사 프리미어리그를 방불케 하는 속도전과 공격 짜임새를 바탕으로 많은 골을 넣는 대구. 이날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는 30200여명의, 시즌 개막 후 빅버드 홈경기 최다 관중이 몰렸습니다.
저는 이날 피버피치 사람들과 함께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거기다 이날 제가 아는 사회학과 분들이 경기장에 대거 출현했었지요. 주연누나와 혜원누나도 경기장을 찾았고, 태식이형한테 경기장 왔다는 전화가 오기도 했었습니다.
아아, 경기장 출입구에 들어갈 때의 일입니다. 경기 시작 시간은 7시 반이었고, 저는 한시간 전에 들어가서 머플러도 지르고, 선수들의 워밍업 훈련도 즐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바로 앞에 들어가던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깁스한 발과 목발. 엄청나게 큰 키(194cm). 검은색 바탕에 수원의 엠블럼이 찍힌 티. 그리고 익숙한 얼굴... '어어어'
박현범 선수였습니다!!!!! 옆에 도와주시는 여자분을 한분 대동하고 계셨지요. 깁스한 것은 최근에 당한 부상 때문이었습니다. 사인이라도 받고 싶었는데, 제가 소지한 필기구가 아무것도 없기도 했고, 완전 소심해져서는 아는 척도 못해버렸습니다. ㅠㅠ 격려의 한마디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아아, 강해지겠습니다.(←-_-;;)
어쨌든, 그렇게 경기는 시작했습니다.
----------이운재-----------
송종국-곽희주-이정수-양상민
-------이관우-조원희-------
김대의-----------------에두
-------신영록-서동현-------
이관우<->남궁웅(하프타임)
신영록<->루이스(59분)
김대의<->조용태(70분)
대구 역시,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패스하겠습니다. ㅎㅎ
시작할 때의 잠시의 탐색전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경기는 양측의 치열한 공격전개로 불붙었습니다. 이관우가 골문 구석을 노리고 날린 슛을 대구 골키퍼 백민철이 몸을 날려 쳐낸 것입니다. 3만 관중의 입에서 동시에 함성이 터지며, 경기장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뒤 득점을 터뜨린 것은 수원이었습니다. 전반 23분, 이관우가 올린 코너킥을 서동현이 깔끔하게 헤딩슛을 터뜨렸습니다. 서동현은 골을 터뜨린 뒤, 다시 달려와서 저번 전북전 때 논란이 일었던 골 세레머니를 다시 펼쳐보이며 스스로 상대 서포터에 대한 도발이 아니었음을 증명했습니다. 전북전 이후 조재진의 언론플레이 때문에 논란에 휩싸이며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싶었습니다.
전북전의 세레머니를 재연하는...
잠시 뒤, 김대의의 프리킥을 곽희주가 헤딩골로 연결하며 경기는 쉽게 끝나는 듯했습니다. 몰아치기에 능한 수원의 모습이 다시 한번 재연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홍진호 주심은 곽희주이 골과는 별개로 공격상황에서 에두가 반칙을 저질렀다며 골을 무효화시켰습니다. 으음... 뭔가 석연찮긴... 했지만 이기고 있는 상황이니 크게 불만을 터뜨리진 않았습니다.
골이다!!!
어, 뭐죠?
잠시 뒤, 대구는 곧바로 동점골을 터뜨렸습니다. 수원의 왼쪽 수비진 깊숙이 뚫고 들어온 에닝요가 긴 크로스를 날렸고, 장남석이 발리 슛을 날리자, 문전에 대기하고 있던 이근호가 발을 갖다대며 골을 만든 것입니다. 이거 오프사이드가 아닌가 싶어 경기 후에 개인적으로 영상을 몇번 돌려봤는데... 결과는 장남석이 발리슛을 때리던 순간 이근호와 최종수비수가 동일선상에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3분 뒤에는 더욱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대구가 수원의 문전에서 프리킥을 얻어냈고, 대구의 키커 에닝요는 프리킥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에닝요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까요. 에닝요는 2003시즌에 수원에서 "에니오"라는 이름으로 뛰었던 선수입니다. 당시 팀을 리빌딩할 계획이던 수원은 데니스와 산드로를 내보내고, 엽기적인 몸싸움 능력을 지닌 뚜따를 영입했고, 나머지 한명의 용병을 뽑기 위해 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당시 테스트를 받았던 선수들의 이름은, 에니오(미드필더), 고가(미드필더), 사논(공격수), 지겔(공격수)였습니다. 네 명 모두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계약에 성공한 단 한명은 에니오였습니다. 어렸지만 강력한 프리킥과 엄청난 스피드가 장점인 선수였지요. 2003년 당시 20여 경기에서 2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습니다. 10월 8일 안양전에서 마지막 역습을 시도하던 기억은 저, 그리고 수많은 수원팬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는 명장면이지요. 하지만 에니오는 2004년 차범근 감독이 부임하며 팀을 떠났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뭔가 법적인 문제인 것 같았습니다. 이중계약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에이전트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축구를 오래 보다 보면, 느낌이란 것이 있습니다. 뭔가 설명할 순 없는데, 지금 이것은 골일 것 같다, 라거나 이 페널티킥은 막힐 것 같아, 이런 느낌이지요. 이러한 느낌은 굉장히 높은 확률로 적중합니다. 불행하게도, 갑자기 이 프리킥을 막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에니오의 강한 슈팅은 이운재의 손이 닿지 않는 골문 구석을 향했고, 그것이 바로 역전골이었습니다. 1:2. 3분 사이에 단 두번의 슈팅으로 역전을 만든 대구의 공격력은 가공할 만했습니다.
수원의 공세가 이어졌지만, 전반은 그대로 끝났습니다.
하프타임에는 제가 앉아 있는 자리로 풍선이 하나씩 전달되었습니다. 불어서 후반전 시작과 함께 흔드는 것이었는데, 원정 서포터석인 S석을 제외한 전 좌석에서 청, 백, 적의 풍선이 흔들거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일반석까지 아우르는 퍼포먼스!!!
차범근 감독님은 후반 시작과 함께 이관우 선수를 빼고 남궁웅을 투입했고, 점차 공격을 강화해갑니다. 결실은 후반 5분에 터지는 듯했습니다. 송종국이 올려준 프리킥을 대구 장남석과 경합하던 곽희주가 골로 연결한 것입니다. 득점이 인정되었고, 선수들이 세레머니를 펼치고, 전광판이 2-2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구 선수들이 항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뭔가 이야기가 오가고, 관중들이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판정이 번복되었습니다. 골을 무효시켜버린 것입니다!!! 곽희주가 핸들링 반칙을 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기장 전광판을 통해 보여진 장면에서 핸들링을 범한 선수는 오히려 곽희주가 아닌 장남석이었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주심이 이미 내려진 판정을 번복한 것입니다. 이는 주심의 권위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축구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의가 있다면, 경기 후에 제소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지요.
수원 선수들이 항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경기가 약 4분 정도 지연되었지요. 관중들도 웅성대며 주심의 판정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그랑블루가 "심판 눈떠라!!" 구호를 선창했고, 이것은 경기장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3만 관중이 동시에 외치는 "심판 눈떠라"의 포스는 정말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잠시 뒤 차범근 감독의 지시를 받은 송종국 주장이 심판에게 경기 재개 의사를 알렸고, 장내 아나운서 투맨의 "어린이들이 보고 있으니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방송이 끝난 후 경기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대단한 것은, 수원이 보여준 냉정함과 자신감이었습니다. 오히려 심판의 어리버리한 오심 때문에 이러한 정신적 강점이 돋보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감정적으로 대응해도 정당할 상황이었는데, 주심이 어리버리하게 동요하는 사이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한 것은 차범근 감독님을 위시한 선수들이었고, 깔끔하게 경기를 재개하는 모습에서는 절대 질리가 없다는 자신감이 엿보였습니다. 이것이 수원이 정말 강한 이유, 라고 생각했습니다.
곧이어 수원은 곧바로 동점골을 터뜨릴 수 있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후반 12분, 송종국이 올려준 프리킥을 신영록이 수비수들 사이에서 헤딩으로 떨궈주는데 성공했고, 이를 노마크의 서동현이 달려들어 깔끔하게 득점했습니다. 백민철은 또 손을 치켜들고 항의하더군요. 에잇, 뻔뻔하게도.
손을 치켜드는 백민철, 보이십니까?
이후 루이스와 조용태가 연이어 투입되고, 수원은 계속해서 맹공을 펼쳤습니다만, 서동현, 에두 등의 결정적 슈팅들은 번번이 득점에 실패했습니다. 조원희가 기습적으로 날린 중거리슛마저 크로스바를 맞추고 말았지요.
이날 조원희의 활약은 엽기적인 수준이었습니다. 홀딩 미드필더로서 상대의 공격을 일일이 끊어냈고, 공격 면에서도 굉장히 빠른 측면 침투로 크로스를 날리거나, 중거리슛으로 골대를 맞추고, 패스를 연결하고. 그야말로 크레이지 모드였습니다.
루이스는, 개인 기술은 굉장했습니다만, 아직 팀에 녹아들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두명에게 둘러싸인 사이에서 좁은 틈으로 크로스를 날리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패스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옆 선수나 뒤로 향하는 등의 모습은 아직 팀에 녹아들지 못했다고 판단내리게 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후반 30분, 수원은 결정적 찬스를 맞이합니다. 코너킥 상황에서 대구 주장 황선필이 서동현을 완전히 끌어안아 넘어뜨린 것입니다. 페널티킥이었습니다!!! 이는 송종국 주장님이 깔끔하게 성공시켰습니다. 대구의 역전을 다시 역전으로 뒤집은 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대구의 완벽한 반칙으로 인한 페널티킥이, 주심의 오심에 대한 보상판정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100% 파울인데, 뭔가 찜찜한 느낌. 이게 다 주심 때문이야!! 에잇. 하지만 이러한 찜찜함과는 관계없이 실제로는 두 손을 치켜들고 역전을 즐겼습니다. ㅎㅎㅎ
강하게 때려넣는 페널티킥이 특징인 송주장님^^
마지막 남은 20여분. 대구는 사력을 다해 득점하기 위한 필사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몇몇 장면은 굉장히 위협적이었습니다. 몇번이나 실점하는 줄 알았습니다만, 이운재를 필두로 한 수비진의 분전으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수원 역시 추가골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서동현의 부산전 골과 같은 힐킥 시도가 실패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 그렇게
저는... 으음, 학교 안에 들어와서 선배님들과 헤어졌고, 내 영혼의 자그마한 안식처인 과방에서 잠시 쉬었다가 기숙사 방에 복귀했습니다.
멋진 경기였습니다. 주심의 바보짓만 조금 빼면, 양팀의 치열한 대결은 팬들의 박수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실 주심의 바보짓 때문에 우리가 정말 강한 팀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요. ㅎㅎㅎ
조금 열받은 것은 대구 선수들이 생각보단 훨씬 뻔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두 골이나 무효가 된 상황에서, 두번째 서동현의 정당한 득점에 대해서까지 대구 골키퍼 백민철은 손을 치켜들며 항의하더군요. 아까 곽희주의 정당한 골장면에서도 손을 치켜들며 항의하던 대구 선수들. 경기 종료 후 "수원같은 빅클럽에게 심판의 보호는 부끄럽지 않느냐"던 뻔뻔한 에닝요. 에라, 너희들이 부당하게 두 골을 무효처리되어서 얻은 이득은 생각지도 않느냐!!! 또 저런 발언이 나오면 모르는 사람들은 심판이 수원을 비호한다며 또 떠든단 말입니다. 사실 비호를 받은 팀은 대구가 아닌가요? 득점이 터질 때마다 골을 무효시켜 주었으니.
뻔뻔한 인간들...
아무튼!!! 다 됬고!!! 대단한 경기였습니다. 그건 사실이지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대구의 "닥치고 공격" 축구. 수원의 냉정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 그리고 도합 5골(7골이라고 말하고 싶지만...)의 멋진 골들. 경기가 끝나고 대구 선수들까지도 수원 팬들의 박수를 받을 정도로 멋진 경기였습니다.
PS1. 사용한 사진은 연합뉴스, 그랑블루 강창우님, 김혜진님이 찍으신 것입니다. 아아, 방학때는 꼭 사진 찍는 기술을 배워서 직접 찍고 싶어요~~
PS2. 수원의 아버지 김호 감독님께서 대전에서 개인 통산 200승을 기록하셨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최근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시면서도...



